소셜 미디어, ‘아직은’ 그들만의 소통
비전 디자이너 visiondesigner21@gmail.com | 2010. 11. 22

1926년 상업 전기의 아버지인 니콜라 테슬라는 ‘콜리어’(Colliers)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방송과 통신의 발전이 인류를 하나의 뇌처럼 만들어갈 것’이라고 예견했다. 테슬라의 예언을 좀 더 학문적으로 구체화시킨 것은 ‘미디어는 메시지다’ 혹은 ‘도구가 인식을 바꾼다’라는 명제로 유명한 토론토 대학의 미디어 구루 마셜 맥루한이다. 1964년 ‘미디어의 이해’(Understanding Media)라는 책을 저술하면서, 맥루한은 한 세기의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하나의 뇌를 이룬 인류가 하나의 ‘지구촌 마을’(global village)로 발전할 것이라 전망했다.

이 꿈은 거의 현실이 되어가는 듯 보인다. 2010년 1월 통계조사기관 닐슨(Nielson)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매년 인터넷 이용자들이 트위터,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를 이용하는 시간이 82%씩 증가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이용자들의 ‘관계 맺기’가 확대되고 있다는 뜻이다. ‘관계 맺기’의 구성원조차 확대되고 있다. 페이스북이 공개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현재 페이스북 사이트는 70개의 언어를 지원한다. 70%의 페이스북 이용자는 미국 밖에서 유입된다. 페이스북의 어플 등을 개발하는 인력은 180개가 넘는 국가에 분산되어 있다. 테슬라가 예언하고, 맥루한이 구체화한 것처럼, 새롭게 열리는 디지털 세상을 통해 국경과 인종과 언어를 초월하여 지구촌이 하나로 되가고 있는 것일까?

트위터에서 만난 한 국내 대학생은 페이스북을 통해 두바이에 거주하는 생면부지의 말라이시아계 화교 여성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대화를 주고 받다가, 항공사에 근무하는 그 여성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진지하게 교제를 생각하게 됐고, 현재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이 같은 소셜 미디어 러브 스토리가 ‘혁명은 트윗되지 않는다’는 저술인 말콤 글래드웰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한 기술사회학자 터프키의 말처럼 온라인에 기반한 지구촌 사회 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을까? 테슬러와 맥루한이 꿈꿨던, 지구촌이 하나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일까?

낭만적인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본 객관적 현실은 비정하다.

하버드대에서 경제사학을 가르치며 ‘금융의 지배’(The Ascent of Money)로 유명한 니알 퍼거슨은, 첫 번째 세계화가 일어난 시기를 1880년에서 1914년으로 추정한다. 무역, 자본 이동, 그리고 이민이 본격화됐던 시기였다. 그 때 사람들은 ‘기술’이 아니라 ‘돈’이 세상을 하나로 묶을 것이며, 그 같은 ‘상호 의존성’에 의해서 전쟁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 주장했다. 결과는 양차대전이었다. 인류는 전에 없던 규모의 소위 ‘세계대전’을 치뤘다. 그렇다면, ‘돈’이 아니라 ‘기술’이면 예외가 될까? 이 주장도 그 과학성을 입증하려면 그 ‘반증 가능성’을 검증해야 한다.

디지털 혁명이, 소셜 미디어가 인류를 하나로 묶고 있다는 이야기의 첫 번째 반론은 ‘국가는 살아있다’이다.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인터넷 연구소, 캠브리지 대학, 토론토 대학의 시티즌 랩, 하버드 로스쿨의 버크만 센터의 연구진들이 공저해 2008년 MIT 출판사에서 출간한 ‘접속 금지’(Access Denied)에 의하면, 전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상업적 목적을 위해 인터넷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들의 정치, 사회, 문화적인 이유에 따라 인터넷 검열을 행한다.

2009년 6월 언론인 앤드류 셜리반은 이란의 선거 부정 감시에 트위터가 사용된 사례인 ‘녹색 혁명’을 보도하면서, ‘혁명은 트윗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 이상과 아직 거리가 멀다. 이란과 중국을 보면 전에 없이 권위주의적이고, 그 사실은 현재 발전상에 근거해봤을 때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그들은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에 없는 검열과 통제의 기술과 제도를 발전시켜왔다. 예를 들어, 구소련은 반정부 활동가를 감시하기 위해 방대한 KGB 조직을 운영해야 했지만, 지금은 디지털 운동 덕분에, 그들의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들의 인맥 지도만 확인하면 된다.

또한, 중국의 블로거이자 언론인 마이클 안티가 지적한 것처럼, 웹 2.0 진화는 이메일을 통해 반정부 활동을 할 때보다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더더욱 시민 운동을 하기 어렵게 만든 면이 있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통한 소통은 중국의 차단 사례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일시에 그 플랫폼이 정지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데다가, 개인 정보의 노출 위험이 높다. 이는 감시와 억압이 더 쉬워졌다는 것을 뜻한다.

소셜 미디어 혁명의 노래는 국가 권력의 냉혹한 통제 앞에서는 침묵한다. 전세계 30개 국가, 전체 인구 14.4%만이 민주 국가다. 이들이 사용하는 소셜 미디어의 현실이, 3분의 2가 넘는 ‘그들 밖의’ 인류의 미래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두 번째 반론이다. ‘다음’ 인터넷 세대는 ‘지금’보다 더 갇힌 인터넷을 사용한다.

현재 약 60억 인구 중 19억이 사용하고 있는 인터넷에 ‘다음 세대’가 추가된다면, 그 다음 세대는 2000년에서 2010년 사이 인터넷 이용 인구 성장 통계에 근거해서 볼 때 아프리카, 중동, 남미, 캐리비안 등 소위 ‘제3세계’에서 올 가능성이 크다.

구체적으로, 전략 컨설팅 업체인 보스톤 컨설팅 그룹(BCG)이 2010년 9월 발표한 ‘인터넷의 새로운 10억 인구’라는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인터넷의 다음 세대는 브라질, 인도, 중국 그리고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주로 오며 현재 6억1천만명에서 2015년에는 12억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한다. 불과 5년 안에 인터넷 인구에 10억이 추가되면서, 저개발 국가의 네티즌들이 인터넷 전체 인구의 40~60%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개인이 소유하는 PC를 통한 ‘개방적이고, 분산적이며, 평등한’ 디지털 세상과는 다른 디지털 세상을 경험한다. 그들의 디지털은 훨씬 더 제한된 미래다.

한 예로, 브라질의 저소득층이 접근하는 인터넷은 대부분 집 안의 PC가 아니라 ‘랜 하우스’(Lan house)라고 불리는 공동 인터넷 이용 센터다. 가정에서 광역망(broadband) 서비스를 감당하기에는 경제적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인구의 약 1% 미만이 인터넷에 접속하던 인도에서는 이제 모바일로 웹을 서핑하게 됐다. 그러나 그 웹은 ‘앱’에 더 가깝다. 그들이 모바일로 접속하는 사이트들은 핸드폰 제조사들이 제공하는 위키피디아, 그리고 페이스북 제로(Facebook Zero)와 같은 동영상, 이미지 등의 고용량 콘텐츠 트래픽을 제외한 단순화된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다.

그리고 이 같은 공동 인터넷 사용과 모바일을 통한 인터넷 접근은 집 안에서 PC로 자유롭게 인터넷을 접근하는 것보다 정부가 사회적으로, 기술적으로 감시가 용이하기 때문에 정부가 더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경제적 이유가 정치적 장벽으로 작용하여 모바일 혁명과 소셜 미디어의 진화도 지구촌 마을의 형성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세 번째, 인프라의 한계를 넘었을 지라도 ‘언어’와 ‘관심’의 문제가 남아 있다. 중국이 접하는 인터넷은 북미와 유럽이 공유하는 영어로 된 콘텐츠가 아니라 대부분 그들의 언어인 중국어로 쓰인 콘텐츠이다. 그 것은 인터넷 선진국이자,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달성한 한국과 일본도 마찬가지다. ‘트위터’의 경우만 예를 들어도, 트위터 이용자 5대 대국 중 하나가 브라질이지만, 브라질의 콘텐츠가 한국어로 넘어오는 경우는 많지 않다. 언어의 장벽이 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을 넘어서 ‘관심’도 이유가 된다. 2010년 지난 추석에 서울에 한시적 폭우가 쏟아졌다. 서울 및 수도권 거주자들에게는 우려의 대상이 되었고, 실시간으로 트위터에서 리트윗에 리트윗이 이어지면서, 서로의 서울 탈출기를 돕기도 했다. 그러나 직접적 연고가 없거나, 당시 날씨가 화창했던 지방에 머무는 시민들에게는 의외의 뉴스였을 것이다. 같은 일은 지구촌 차원에서,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의 세계에서 반복이 된다.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한 플랫폼 위에 공존하고 있지만, 막상 그들 간에는 공통의 ‘관심사’가 생각보다 부재할 수 있다.

넷 째로, 정치경제적 현실, 인프라의 한계, 언어와 관심의 장벽을 넘어섰다고 해도, 우리는 정말 소통하고 있는 것일까? 인터넷 이용자들의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 이용 시간이 매년 82% 증가하고 있다는 닐슨의 발표 자료는 그들이 더 많은, 더 나은 소통을 하고 있다는 결론과 ‘직결’되지 않는다.

문예이론가이자 사상가였던 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에서 사진을 통한 현상의 이해가 그 현상 이면의 진실을 진지하게 접근하려는 인간의 가능성을 막는다고 비판했다. 사진의 현란한 이미지에 자신의 판단을 맡겨버린 순간, 인간은 그 이미지 너머의 현실이 아니라 그 이미지 안의 현실에 제한되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가 약속하는 ‘소통의 혁명’도 그 같은 위험이 있다. 매일의 소통과 사건사고에 대한 이해를 소셜 미디어에 맡기고 타인의 평가에 의뢰하는 순간, 자신만의 힘으로 사고하고, 그 전달된 사실 너머의 현실을 냉정히 보는 힘은 약화된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라디오, TV, 케이블, 영화, 그리고 이제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수많은 매체를 실험하며 시간과 공간, 정치와 경제, 언어와 계층으로 나뉘어 있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으려 노력해왔다. 테슬라의 비전을 맥루한이 구체화시켰고, 지구촌 한 마을은 이제 눈 앞의 현실이 된 듯하다.

그러나 살펴봤 듯, 그 현실은 아직 ‘모두의 현실’은 아니다. ‘그들만의 소통’은 국가의 통제에 의해, 경제적 환경에 의해, 이용자의 편이에 의해 정당화되고 보편화되고 있다. ‘그들’이 ‘우리’가 되기까지는, 기술의 발전을 넘어 각자가 처한 정치경제적 현실에 대한 이해, 그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적극적 방안의 마련이 필요하다. 하버드 버크만 센터의 에단 쥬커만이 운영하는 전세계 1인 블로거들의 뉴스 공동체인 ‘글로벌 보이스’(Global Voice)가 그 한 예일 것이다. 쥬커만은 블로거 자원봉사자들을 통해 전세계 구석구석의 뉴스들을 한 곳에 모으고, 다시 또다른 자원봉사자들을 통해 그 뉴스들을 다국어로 번역한다.

물론, 희망은 있다. 예일대학교 세계화연구소 출판간행물 디렉터인 나얀 찬다는 2007년에 발표한 ‘세계화 전 지구적 통합의 역사’(Bound Together)에서 세계화를 ‘무역상, 전사, 탐험가, 선교사 4개 그룹에 의하여 진행된 전지구적이며, 전역사적인 흐름’으로 정의하고 분석했다. 그가 다시 책을 쓴다면, 한 그룹을 더 추가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PC, 인터넷, 월드 와이드 웹(WWW), 그리고 소셜 웹 혁명을 유년기부터 경험하며 자란 새로운 디지털 세대, ‘디지털 네이티브’다. 이들은 새롭게 열린 소통의 매개를 통해서 상호 작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버드 로스쿨의 존 폴프리와 우르스 가서가 ‘그들이 위험하다’(Born Digital)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들은 긍정과 부정을 떠나서 폐쇄적 공간에 자신을 가두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들이 주역이 되는 시대가 온다면, 20세기가 남긴 정치경제적 한계도 하나의 베일로 거두어질지 모른다.

그 희망이 가시화될 때 까지는, 아직은, 합리적 의심을 견지할 때다.

 2008 BLOTER.NET. CC BY-NC-ND. | http://www.bloter.net/archives/42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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