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진화론, 인간의 본성을 그저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모든 동물은 자신의 활동 범위가 한정적이고 일반적으로 그 범위에서 사는 '기간'도 한정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류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살기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정복이라는 방식으로 먼시야를 통해 장기적인 욕구를 갖고 살아왔다. 그렇게 겉으로는 빠른 시간안에 진화해왔다. 아니 지구를 정복했다. 그 것으로 인해 인류와 다른 모든 것들의 사이에는 선이 그어졌다. 유발 하라리의 글처럼 존재하지 않는 국가나, 종교같은 것들을 굳게 믿음으로 인류를 간신히 유지시키고 있는 것이 전부라는 인류의 하찮음의 대한 평가는 지금의 인류 모습을 정의하기에 딱인 것 같다. 그 하찮음은 현재에 와서 자본이라는 것을 통해 바라볼 수 있다. 인간관계, 삶의 질 향상, 생계등 숫자가 적힌 종이 쪼가리만 있으면 모두 해결할 수 있다. 넘어서 사치도 부릴 수 있다. 곧 자본은 신보다 위대하고 국가 따위는 무시해 버릴 정도로 엄청난 지위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근대의 문제인 ‘신자유주의’ 와도 직결 되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과연 성차별, 인종차별, 계급사회의 문제를 극복 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단지 자본 앞에 잠시 움츠려 들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한국의 사회는 불안정 상태이다.  빠른 시간동안 많은 것이 바뀐 것 처럼 국민은 속아왔다.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만 봐도 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나 기업을 위한 나라라는 한국의 별명은 한국을 그대로 설명해준다.


 내가 배워온 문제 중에 에너지 문제는 한국에서는 각광을 받아왔던 주제 거리다. 한국의 가정에서 쓰는 전기소비량의 합은 기업의 전기 소비량을 넘지 못한다. ‘누진세’ 라는 어이 없는 정책으로 꼭 시민들이 전기를 많이 쓰는 것 같이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많은 학습용 교재에는 ‘방에서 나갈때 불끄고 나가기’ ‘콘센트 뽑기’’멀티탭 사용하기’ 등등 우리의 에너지 소비문화를 지적하는 글귀를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어이가 없네’ 다. 보호종인 어름치를 지키자고 문구가 적힌 표지판을 뽑아내고 4대강 공사를 강행한 미친놈들 정도면 가능한 지적이다. 그들이 우리가 그들에게 ‘우리의 소비 권리를 존중해 줘라’ 라고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에너지를 아껴 쓰라는 말은 원전이 세워진 한국에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한국은 항상 40% 이상의 전기가 남아돈다. 원자력발전소는 화력발전과 달리 껐다 켰다 하는 스위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원전을 가동중지 하는 데는 1주일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도 후쿠시마 참사,사고 이후 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많이 바뀌었다. ‘원전 옆에 안살아야지’ ‘사고나면 어떡하지?’ 그렇지만 아직도 원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국민의 절반을 넘는다. 원자력발전소는 일상생활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엄청난 발전력을 가진 원자력 발전으로 인해 한국의 야간노동문화는 발달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의 야간노동 문화는 거의 선택권이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노동력을 착취하고 그들의 생활권을 제재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편의점이 원전 3기에 해당되는 전력을 섭취하고 있다는 것. 편의점 예시 정도면 이제 이 문제를 현실로 직시하기에 충분하다. 국민의 99%가 편의점을 애용하고 있지 않은가. 편의점은 현대의 정착,소비사회의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편의점의 소비문화는 아까 이야기 했듯 인류 제2의 정착 사회를 뜻한다. 예로는 정착사회는 마을을 뜻했고 공동체와, 부족을 뜻했다. 지금의 제2정착사회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같이 정없는 사람들을 정착시켜 도시라는 거대한 인류뭉텅이를 만들어 놓은 이 사회는 무엇을 뜻할까? 이 문제는 뫼비우스의 띠와같다. 소비하기 위해 도시라는 곳에 정착했다. 그리고 소비하기 위해 생산한다. 여기서 생산이라는 것은 대부분 생존과는 먼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트렌드를 따라가야 생존할 수 있는 참 이상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트렌드가 보통 모방에서 온다는 소비자들의 불호가 갈리긴 하지만 확실히 한국은 트렌드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다. 소비와 낭비로 이루어진 유행이라는 문화의 영향은 굉장하다. 한국에서 내구성이라고 찾아볼 수 없다. 2년 약정이 채 되기도 전 부터 말썽인 나의 핸드폰만 봐도 그렇다. 아 사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유행이라는 문화 그리고 육식문화, 그리고 에너지 문제 모두 같은 모습이다. 어떤 것을 위해 어떤 것을 포기해버릴 정도로 사람들은 어떠한 인력에 의해 끌려가고 있다. 왜 사람들은 빠른 것을 추구하게 되었을까? 나 나름 사피엔스 저자인 하라리 같은 해석을 펼쳐보았다. 사회 흐름의 빠른 속도는 불편한 것을 거부한 사람들의 결과물 이었다. 자본주의에 짓눌려 형태를 알기 힘든 한국의 민주주의는 단지 인구를 숫자로 본 일부의 누군가들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 국가에게 우리 국민은 골칫거리 시민은 어려운 대상이 된 것일까? 당연하다 우리는 그들의 물건을 사줄 수 있는 자본을 가진 소비자들이다. 그들의 물건을 사야만 이 나라는 지금의 상태를 유지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들, 일부의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 넘길 순 없다. 우리의 무엇인가로 부터 둔하게 퇴화된 ‘우리' ‘함께’ 행복이라는 감정, 감각을 되살려야만 한다. 


‘자본주의가 무너뜨린 댐’ 이것은 다름 아닌 공동체였다.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에 다닥다닥 붙어 주거한다고 해서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공유하고, 서로 소통하고 ,친구를 사귀고… 뭐 이런 교육방식이 요즘들어 통하기 시작한 것 같긴하다. 하지만 여기 말하는 공동체라는 것은 함께 이쁘고 싼옷을 공유하고, 휴대폰 요금제에 대해서 물어보고, 와이파이존을 찾아 함께 어슬러거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삶의 질을 다시금 회복하기 위해서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한다. 의,식,주도 그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트렌디한 이 시대에 들어와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 같은 사람이 많은 사람들의 롤모델로  형상화 되었다. 이런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가 문제가 있더라도 이들의 행실을 비난할 권리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인터넷 익명 가볍고 쉽게 큰 결과물을 가져올 수 있는 사회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의 생각의 인식이 한 쪽으로 많이 치우쳐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이 사회를 받아들이지 못한 그들은 호주에 처음 인류가 정착했을때 멸종했던 50cm이상의 생물종들 마냥 무참히 멸종하거나, 위축되고, 무시되었다. 그로인해 제2의 정착사회에 이어 제2의 이신론주의자들이 이 세상하게 발을 디딘 것이다. 그들은 인권을 외치고, 에니미즘 등등 소외된 자들과 자신의 이야기들을 하고있다.  아주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사는 지금에 인간들의 파가 정확히 2분법적으로 나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앞서 말한 지금의 무분별한 사회에 대항하는 사람들의 예시는 나의 아주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고 그들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사회와 대립할만큼 크지 않다. 이런 과정 마저 어떻게 보면 인류의 시대 안에서 다양한 종으로 진화되는 자연적인 진화의 과정또하는 인류의 종말,멸종을 고하는 희미한 신호 정도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신호를 거부한다면 어떤 재앙은 또 찾아올 것이다. 자본주의에 반응한 기후변화라는 재앙처럼,앞으로 인류는 더욱 더 큰 위기를 체감할 것이다.


 우리의 삶을 진화론적으로 분석하고, 깨닮음을 갖는 것은 좋다. 다만 그것은 미래에 대한 해답이 되지 못한다. 역사를 보면 미래가 보인다는 말,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다. 그렇지만 그것에 의지해서는 절대 안된다. 그렇게 흘러가면 우리는 인류의 방향을 꺾을 수도 없고 앞으로 100억의 인구를 감당할 수도 없다. 지금의 과학기술로 지금의 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지구에 정착해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우리는 지구에 정착한 외계인에서  공유와 소통으로 부터 시작하는 공동체를 다시 만들게 된다면 다시 우리는 다시 진화한 수렵사회로 돌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