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성주의를 말하다(日本反知性主義)>, 우치다 타츠루 외, 이마

 

 

미국의 반지성주의, 일본의 반지성주의, 한국의 반지성주의

 

<반지성주의를 말하다><일본의 반지성주의>라는 원제를 가진 책으로서, 우치다 타츠루를 비롯한 저자 10명이 현재 일본 사회에서 점점 눈에 띄게 드러나는 반지성주의적 현상에 대해, ‘반지성주의라는 개념을 설명하는데 있어 대표적인 책인 <미국의 반지성주의>의 일본 버전으로 엮어낸 책이다.

반지성주의란 배움과 토론, 독서, 집필 등 지성적이라 분류될 수 있는 여러 활동들과 그런 활동을 업으로 삼는 이들을 혐오하고 지성적인 것에 반하는 경향이다. 이 반지성주의란 것에 대해 <반지성주의를 말하다>에서는 일본 근현대사의 맥락에서 어떤 흐름으로 반지성주의가 심화되어왔는지, 최근 드러나는 극단적인 반지성주의와 우경화, 적대는 어떻게 연결되어왔는지 이야기한다. 또한 반지성주의를 분석하고 비난하는데서 나아가 인류 혹은 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지성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그것은 동시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의 반지성주의>라는 원래의 제목이 굳이 <반지성주의를 말하다>로 바뀐 것은, 아마 반지성주의라는 단어가 아직 한국에서 익숙하지 않은 단어(<미국의 반지성주의>조차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인 때문도 있겠지만, 아마 반지성주의가 마치 암세포처럼 사회에 퍼진 과정에 있어 일본과 한국이 서로 닮은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일본이 겪은 문제를 10년 뒤 한국이 겪게 된다는 말도 있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전후로부터 일본사회에 반지성주의가 뿌리를 박고 자라온 과정은 한국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2차 세계대전의 종전 후 사회는 자본이라는 새로운 기준에 맞춰 교육의 목적과 방식을 변경한다. 흔히들 얘기하는 입시위주의 경쟁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배움이라는 것은 점수를 따내기 위한 것으로만 존재하게 되었고 점수가 높은 쪽은 높은 쪽대로 낮은 쪽은 낮은 쪽대로 반지성적인 학습에 자만하거나 지성 자체를 혐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 와중에 제대로 된 지성, 배움이라는 것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도 수없는 답이 있겠지만 일단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토론하며 새로운 시각을 얻으려는 태도라고 뭉뚱그려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매몰되지 않고 스스로를 깨우쳐줄 스승과 동료를 필요로 하는 그런 배움은 사실 개인의 삶 이상의 차원에서 사회와 국가를 진보시키는데도 일조하는 것인데, 오늘날 일본과 한국의 상황은 그렇지가 못한 것이다. 더욱이 정치가들에 의해 군중은 점점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혐오하고 지성인들을 자기 밥그릇 뺏는 이들로 바라보고 있다. 또한 자기 세계에 없던 것을 환영하지 못한다. 역사 왜곡과 소수자, 약자 혐오도 그런 맥락인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많은 내용 중 천황 체제의 역사 같은 것을 제외하면 모두 여기 한국의 상황에 적용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고, 일본은 많은 감정이 오가게 되는 이웃나라인 만큼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본다면 충분히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많다.



반지성주의를 말하기 전에 지성을 말하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저자들이 모두 공손하다는 것이다. 그들 중 누구도 반지성주의에 대한 전문가처럼 굴지 않으며, 오히려 누군가를 반지성주의자라 단정 짓기를 매우 꺼린다. 그 이유는 지성이란 것에 자신을 갖기 전에 반지성주의를 논하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 총리, 도널드 트럼프 같은 유별난 인물들을 보며 참 반지성적인 분들이셔라고 말하기는 무척 쉽지만, 그래서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분히 지성적이냐 거나 스스로가 충분히 지성적이냐면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골적으로 반지성적인 인물들을 상대하지 못하고 그들이 비상식적이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이유 이상의 논리가 없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충분히 반지성적이다.

그래서 우치다 다쓰루와 몇 저자는 지성에 대해 다시 찬찬히 생각한다. 기쁨을 주고 삶을 바꾸는 배움, 자신의 틀을 버리고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등의 태도들이 지성적이라 불릴 만한 것이라 말한다.

요컨데 <반지성주의를 말하다>에서 말하는 지성은 협동이다. 배움은 스스로를 잘나거나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변화를 주고 도움을 주기 위해서, 또 그 과정에서 받기 위해서 하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혼자의 생각에 고집을 부릴 필요도 없고 억지를 부릴 필요도 없다.

반대로 반지성주의는 이기를 위한 논리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 모든 사고와 근거의 초점이 이미 확정된 결론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지성적인 모든 주의(主義)’나 경향들은 논리나 사실관계에 의해 스스로의 의견을 수정할 생각이 애초에 없다. 그렇기에 공동체가 뭔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거나 이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저 화술로 얻어낸 개인의 정치적 이익만을 보장해준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책에 딴지를 하나 걸자면, 대안으로써 제시하는 것들이 너무 모호하고 관념적이라는 것이다. 반지성주의의 발발 원인에 대해서는 사회의 경쟁화에 따른 교육의 단순, 획일화, 거기서 파생된 계급간 갈등과 몰이해 등으로 자세하고 길게 설명하고 있지만, 그래서 각자가 또 사회가 어떻게 다시 지성의 길로 들어설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누군가 책에서 언급했듯 지성에 대한 경외감이나 인식은 누군가 주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건강한 지성을 유지하는 것이 삶을 잘 사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 건지도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성을 깎아내기로 매도하는 교육 시스템을 바꾸고, 많은 사람들이 싸구려 언론을 통한 책임감 없는 정치가들의 말에 놀아나지 않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저 다시 재앙을 맞고 그걸 지성적으로 해결하려 하는 노력을 되풀이 하는 수밖에 없나 싶은 생각이 든다.

여하튼 <반지성주의를 말하다>의 제목은 다시 한 번 <지성을 말하다>로 바뀌어도 괜찮지 않을까 한다. 어차피 반지성과 지성은 떼놓을 수 없다고도 하니까, <반지성과 지성을 말하다>와 같은 식으로 바뀌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