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페미니즘학교 1강부터 5강까지

 

베넷, 마야 그리고 청년과정의 쥬디, 자베, 인다와 함께 에코페미니즘학교에 참여했다. 수료식까지 끝난 지금 세 갈래로 나뉘어 생각을 정리해봤다.

 

에코페미니즘이 뭐지?

에코페미니즘이라는 책을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 하자 책방에서 페미니즘 관련 도서를 즐겨 찾아 읽곤 하는데 그러던 중에 알게 된 책이었다. 그런데 사전적 용어가 많고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몇 페이지 읽지 못하고 덮어버렸던 것이다. 혹시 관련이 있을까 해서 바로 옆에 꽂혀져 있는 책들도 읽어보았지만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여러 차례 그랬던 거 같다. 사전 정의로 알 수밖에 없는 걸까 하고 거의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에코페미니즘 강의를 들으면서 놀랐던 것은 에코페미니즘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전 정의보다 나는 에코페미니즘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여성을 대하는 방식은 씨앗과 동물 등을 다루는 방식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대리모 사업을 주제로 한 구글 베이비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 중간쯤에 나오는 배가 잔뜩 부른 여성들이 똑같은 침대에 열 맞춰 누워 있는 모습이 나온다. 시간에 맞춰 일정한 양의 밥을 먹고 아기를 낳을 날짜를 기다리는 여성들. 병원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영화를 보며 돼지공장이 떠올랐다. 갖은 주사를 맞으면서 몸을 부풀리는 공장의 돼지들. 수컷 돼지들은 일정한 크기가 되면 차에 실려 나간다. 암컷 돼지들은 새끼를 낳기 위해 1년 내내 임신과 출산을 반복해야 한다. 대리모와 암컷 돼지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약자의 위치에 있는 것들을 더욱 내모는 남성의 논리가 현대 사회의 절대적인 가치인 돈과 결탁했을 때 지배와 착취는 한층 더 강력해진다. 나는 대리모와 암컷 돼지를 예시로 떠올리면서 에코페미니즘은 그런 지배와 착취의 시스템에 반대하고 같이 살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약자의 위치에 있는 것들을 해방시키자고 이야기하고 어떤 것을 지배하고 착취하지 않고 살 수는 없는 거냐고 질문한다. 그래서 에코페미니즘운동은 저항 운동이고 해방 운동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 전환 운동이라는 표현이 좀 더 적절한 것 같다. 이 시스템에서 벗어나서 새롭게 여성과 씨앗과 동물 등의 모습을 상상하자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를 다시 이해할 수 있었고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든 전환이 필요한 때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 시스템이 발생시킨 문제점들은 다른 관점에서 보아도 많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는 여성의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되어 좋았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가 훨씬 확장된 느낌이다. 하지만 에코페미니즘에서 이야기하는 돌봄과 살림은 아직 내게 좁은 범위로밖에 생각이 되지 않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질문들이 있다. 공부해야할 것은 아직 한참 남은 것 같다.

 

 

모성을 질문하다

최근에 논란이 되었던 주방 세제 트리오 50주년 기념 광고를 예를 들어보면 1분짜리 광고에서 포커스를 맞춘 장면은 50년 동안 가족들을 뒷바라지하며 설거지하는 엄마의 뒷모습이다. 세월이 흘러도 엄마는 항상 주방 세제와 함께 부엌을 지키고 있다. 뭐라고 포장도 할 수 없는 이런 광고가 50주년 기념 광고라는 것에 나는 조금 놀랐다. 시대가 변하고 있는데 엄마라는 이름 뒤에는 여전한 꼬리표가 따라오고 있구나. 희생, 헌신, 내리사랑 등. 광고 속 장면들이 광고를 보고 나서도 계속 생각이 났다.

 

나는 엄마가 되고 싶다고 생각 없이 잘 말하고 다녔고 아기나 동물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곰곰 생각해보면 나는 모성이라는 단어가 요구하는 모습에 딱히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희생, 헌신, 내리사랑 등과 같은 단어가 가끔은 나를 불편하게 했지만 모성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왜 엄마가 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없었다.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책에서 모성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을 발췌했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인생을 대신 살 수 없지만, 유독 어머니만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남편을 출세시키고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야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맞으면서도 그를 변화시켜야하고, 어머니는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 앞에서도 자녀에게는 모성애를 발휘해야 한다. 아이를 남기고 폭력 가정을 탈출하는 여성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순결이 그러하듯이 모성애 역시 여성의 목숨과 맞바꿔야 한다는 남성 사회의 메시지다. 훌륭한 어머니가 되려는 여성은 자신을 파괴하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2년 전에 읽은 책이다. 페미니즘은 줄곧 나에게 모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는데 왜 나는 에코페미니즘학교를 통해 모성을 본격적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다시 읽으니 느낌이 달랐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위치시키는 여성의 모습을 거부하지만 한편으로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나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떤 것을 위해존재하는 모성의 모습을 살펴볼수록 사회가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었다. 모성은 여성이라면 가리지 않고 동일하게 적용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모성의 사전적 정의만 봐도 알 수 있다. 아기를 낳을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사회가 인정하는 여성이 될 수 있다. 장애인, 동성애자, 불임 여성, 노인 등은 거기서 쉽게 제외되었다. 선생님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특정 여성에게 국한되는 모성이 뭘까 하고 생각했다. 특정 여성의 여성다움이 아기를 낳을 수 있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것인지. 모성 알레르기라는 단어가 있다. 모성 강요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반응을 말하는 것인데 나는 처음 이 단어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었다. 알레르기를 나타낼 정도일까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의를 들을수록 점 점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성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모성은 특정 여성이나 성에 위탁할 것이 아니다. 생명을 향한 존중과 사랑을 성과 개인의 몸에 따라 나누지 않고 다시 생각할 수 있을 때 모성이라는 단어가 사라질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성다움이라는 것도 여성이 무엇이 되어야 부여되는 게 아니라 여성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의미로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랬을 때 여성과 어머니는 분리되고 트리오 50 주년 기념 광고 같은 것을 더 보지 않아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에코페미니즘학교를 통해 크게 깨닫게 된 것 중 하나는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특정한 관점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차별 당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언어를 점검하고 재정비하고 좀 더 나은 언어를 고민하는 공부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강남 역 근처 노래방에서 살인 사건이 있었다. 범인은 여성을 타깃으로 살인 계획을 세웠고 20대 초반의 여성을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지난 5월의 일이다. 시민들은 분노하며 강남 역에 희생자를 위한 추모 공간을 마련했다. 특히 여성들이 분노하며 그 곳을 많이 찾았다. 여성이기 때문에 살해당했다는 사건의 진실은 강남 역 한 편에 빼곡하게 포스트잇을 붙이게 했고 여성들의 자기 경험을 마구 토해내게 했다. 마치 봇물 터진 것처럼 각종 경험담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여성들의 반응에 대해 이야기했다. 남성들은 알 수 없는 반응이라고 고개를 내젓고 분노하기도 했다. 다른 것을 경험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생긴 이해관계가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으며 등 돌리게 했다. 이 사건이 사회적인 혐오 문제로 번지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은 이상한 의미로 해석되었다. 여성 혐오라는 키워드도 점 점 더 과격한 언어로 이야기 되고 있었다. 나는 내 나름의 의견을 쓴 종이를 들고 강남 역에 갔지만 그걸 바닥에 붙이면서도 아리송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떤 생각을 하면 좋을까 하는 질문이 계속 들었고 내가 이런 걸 붙여도 되나 싶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통해 페미니즘을 다시 생각해보려고 했다. 이 단어는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정의가 필요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혐오를 지지하는 말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도 해봤지만 솔직히 쉽지 않았다. 그래서 판돌들에게 에코페미니즘학교를 제안 받았을 때 눈이 번쩍했다. 실마리를 얻은 느낌이었다.

 

이어서 강남 역에 갔던 날의 기억을 계속 이야기하고 싶다. 어렵지만 이 사건은 내게 종결되지 않은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번 역이 강남 역이라고 알려주는 목소리를 들을 때부터 내 가슴은 엄청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강남 역 사건이 있은 지 일주일이 지난 주말에 갔기 때문에 계단을 오를 때부터 사람들이 많았다. 가방에 리본을 달고 한 손에 꽃을 준비한 사람들. 우리는 같은 곳을 향해 갔다. 그곳은 이미 빼곡하게 포스트잇과 종이가 붙여져 있었다. 눈물과 분노로 얼룩진. 그리고 여성을 조롱하는 욕설이 휘갈겨진 포스트잇도 같이 볼 수 있었다. 내가 거기서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을 가다듬고 종이를 바닥에 붙이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 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꼼꼼하게 종이를 붙이고 몸을 일으켰는데 그 순간 나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을 느꼈다. 어떤 해방감 같은.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웃음이 나왔지만 동시에 울고 싶어지기도 했다. 내가 한 것은 내가 여성인 것을 인정한 것뿐이었는데.

 

그리고 에코페미니즘학교를 통해 나는 또 한 번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정말 흥미진진하게 매 강의를 들었다. 내가 알고 있었던 페미니즘이 좀 정리가 되는 것 같기도 했고 새삼스럽게 질문하게 되는 것도 있었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는지 고민했던 때가 떠오른다. 페미니즘 관련 책을 읽을 때나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나 하자의 판돌들을 보면서 종종 그런 고민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 때마다 그 정도까진 아닌데 하고 생각했다. 대단한 사람으로 본인을 소개하는 것 같아 난감한 느낌이 들었다. 페미니즘이 계속 내 언어로 잘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도 있었다. 에코페미니즘학교 첫 번째 강의 때 김신효정 선생님은 질문하셨다. 본인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나는 망설이다 결국 손을 들지 못했는데 지금이면 손을 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여성인 나를 돌아보고 세계와 연결해서 생각하는 꾸준한 과정을 통해 페미니스트는 여성을 존재 자체로 긍정하고 억압과 차별을 에너지원으로 굴러가는 가부장제에 ‘NO!' 라고 외칠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다. 그리고 앞으로도 페미니즘과 관련한 공부를 더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