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인류학 특강이 이제 마지막 강의만 남겨두고 있네요. 주간리뷰 때 이야기했듯이 마지막 강의 전에 우리의 질문들을 모아보면 좋을 것 같아요. 여기서 댓글로 모아볼까요?

질문을 모으기에 앞서서...

하자작업장학교에서 지내면서 수업과 관련해서 죽돌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이 하나 있어요. '이걸 왜 배우는지 모르겠다'는 질문인데요. 특히 인문학 강의와 관련해서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이었어요. 제가 전쟁에 대한 워크숍을 진행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개설된 수업 후에는 이런 질문들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좀 나눠봤는데요. 죽돌들이 수업을 본인들의 일상이나 진로와 어떻게 연결시켜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인문학 강의는 세계를 읽어내는 관점과 방법을 알려주죠. 그래서 인문학 강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려면 강의에서 나오는 이야기의 배경과 맥락, 그리고 강의 목적을 분명하게 공유할 필요가 있어요.

그런 점에서 주간리뷰에서 집시가 '이번 강의를 듣고 나우노아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참고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을 때 이번 특강의 목적이 분명하게 공유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나우노아 같은 실천들을 하기 위해서 쿨라와 포틀래치와 같은 사례들로부터 참고할 수 있을 만한 지혜를 얻으려고 했던 것이지요.

다만 사례와 그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남는 것 같아요. 쿨라와 포틀래치는 우리에게 어떤 지혜를 주는 사례일까요? 혹은 쿨라와 포틀래치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지혜를 구할 수 있을까요?

지난주 강의 때 낮달과 세모가 던졌던 질문이 이러한 지혜와 연관될 텐데요. 호혜와 환대에 기초한 의례가 있었더라도 그것이 100여 년 전의 사례들이고 심지어 서구 자본주의에 밀려서 사라진 것들이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질문이었죠.

선생님께서는 분명한 답을 주셨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는 가정에 철저하게 기초해서 살고 있지만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선 오히려 호혜와 환대가 삶의 기본적인 방식이었다는 것이었지요. 쿨라와 포틀래치가 그런 본성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상상력을 발휘하라고 역으로 주문하셨어요. 쿨라와 포틀래치가 우리의 '오래된 미래'가 될 수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히옥스도 주간리뷰에서 마찬가지로 상상력을 강조하셨죠.

하지만 상상력의 문제로 이야기하게 되면 그때부터 질문은 불가능해집니다. 여기서부터 비판적 분석은 막히고 오직 믿음의 문제만 남게 됩니다. 그러려면 인간의 본성이 호혜성이며 그것이 인간의 도덕적 삶의 뿌리이자 반석이라고 주장하면서 교환과 거래는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에 불과하다는 전제를 믿어야 할 텐데요. 제가 보기에 지금 질문을 던지고 있는 죽돌들은 그러한 전제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쿨라와 포틀래치라는 두 가지 사례를 봐도 무조건적인 호혜성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믿을 근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셨듯이 자본주의 사회가 촘촘하고 빈틈이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10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저는 자본주의 전/후를 너무 단절해서 보면 쿨라와 포틀래치와 같은 사례들로부터 지혜를 구하기가 어려워진다고 봐요. 자본주의가 자리잡기 전에는 인간들이 호혜와 환대에 기초해서 살다가 자본주의가 도래한 이후에는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되어버렸다는 식으로 나눈다면 말이죠. 선생님께서 지난 강의 때 소개해주신 브뤼노 라투르라는 사람도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었다>라는 책에서 그렇게 말해요. 의례/시장 같은 이분법적인 구분은 근대인들의 상상이지만 결코 현실이 된 적이 없다고요. 원주민/호모 에코노미쿠스 같은 이분법 역시 근대인들의 상상에 불과한 것이죠. 사실 지폐라는 종이쪼가리에 경제적인 가치가 있다고 믿는 믿음이야말로 얼마나 주술적인가요. 반대로 쿨라나 포틀래치를 통해서 지위를 유지하려는 그 욕망은 또한 얼마나 거래적인가요.

우리는 사실 100년 전 미크로네시아의 원주민처럼 살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늘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살지도 않습니다. 다만 화폐가 주술적인 힘을 강력하게 발휘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나우노아 같은 실천을 소소하게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빅맨이나 추장을 모시기엔 충분히 비판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화폐의 주술성을 넘어서면서도 동시에 의례를 무비판적으로 반복하는 믿음에도 저항해야 합니다. 두 가지 과제가 우리에게 동시에 요구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쿨라와 포틀래치로부터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 종로3가에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영화 <위캔즈>에서 봤듯이 익선동 지역에는 예전부터 성소수자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는 가게들이 많이 있는데요. 밥과 술을 사먹는 건 자본주의적인 관계겠지만 단골 사장/손님들이 함께 만나고 파티하고 때로는 새로운 운동을 위해서 무언가 작당모의할 수 있는 힘도 얻습니다. 이러한 공간은 과연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공간일까요? 아니면 호혜성에 기반한 공간일까요? 아니면 그러한 이분법적인 구분이 모호해지는 공간일까요?

저는 우리가 쿨라와 포틀래치를 나우누아에 어떻게 참고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해보고 방법을 모색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히옥스께서 이야기하셨던 것처럼 강사가 가르쳐주는 대로 따라가보는 것도 필요하겠지요. 때로 어떤 죽돌들은 '내 일상에 어떻게 적용할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마치 방패처럼 쓰면서 자신의 게으름을 정당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질문을 던지는 죽돌들의 말은 그러한 방패막이와는 다릅니다. 오히려 쿨라와 포틀래치로부터 지혜를 제대로 구하기 위해서 분투하고 있다고 봐요. 그래서 질문이 자꾸만 막히는 지점에서 다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이런 질문을 상상력의 문제로 가로막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