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뻘 성폭행하려다 살해한 노인도 ‘존엄’한가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14. 사형제 위헌심판(상)
한겨레
보성 앞바다 배 위 현장검증에서 범행 당시 상황을 재연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14. 사형제 위헌심판(상)

보성 어부노인 살인 사건
1심은 사형을 선고했고
광주고법은 위헌제청을 냈다
헌법재판을 맡은 나로선 난감했다

‘살인범이 불쌍한 면이 있으니
사형은 안된다’를 넘어서야 한다
저 금수만도 못한 사람을
국가 손으로 죽일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형은 안 된다’고 말할 것인가
 

더위가 거의 물러간 8월의 마지막 바다는 잔잔했다. 저 멀리 보이는 육지 모습도 한없이 평화로웠다.

노인은 보성 앞바다에서 1t짜리 배를 몰고 주꾸미 잡으러 다녔다. 일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이 셌다. 뱃전에는 여행 온 열아홉 청춘 남녀 둘이 나란히 걸터앉아 여름 끝물 저녁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그들 뒤로 몰래 다가갔다. 그러곤 순식간에 청년을 뒤에서 떠밀어 물에 빠뜨렸다.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며 배에 다시 기어오르려는 청년을 삿대로 내리치고 찍고 떠다밀었다. 얼마 뒤 청년은 어깨, 팔, 정강이가 부러져 물 아래로 사라졌다. 노인은 젊은, 아니 어린 여자에게 다가갔다. “아가씨, 유방 좀 단도리 해보자고.” 싫다고 발버둥 치던 여자도 바다 밑으로 사라졌다. 다시 조용한 저녁 바다로 돌아갔다.

 어린 처자들 유방을 단도리 짓겠다고… 

한달 뒤 스물서넛 나이 여자 둘도 같은 바다에 떠밀려 죽었다. 노인은 이 여자들에게도 꼭 같은 말을 했다. “아가씨, 나는 작년부터 관계를 못 하는데 아가씨 유방이라도 단도리 해버려야 돼요.”

노인은 붙들려서도 횡설수설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다. “얘들이 운이 없었고 불쌍혀”라고도 했고, “나와 니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팔자를 타고났는가 벼”라고도 했다.

노인은 50년을 해로한 처에다 중년 자녀들을 여럿 두었다. 그런데 손녀 같은 처자들에게….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닌다.’ 우리 헌법 제10조는 이렇게 엄숙히 선언한다. 그럼 저 ‘금수만도 못한’-하긴 대부분 남자들 내면 깊숙이 이런 금수 기질이 숨어 있을는지도 모른다-노인도 헌법이 말하는 ‘모든 국민’에 들어갈까. 그래서 저 노인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는 걸까.

1심 법원은 노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아니 어쩌자고 광주 고등법원은 이 노인의 살인에 대해 사형을 예정한 형법 제250조가 헌법에 위반된다고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을 한 건가. 왜 하필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는 이 사건에서.

광주 이상갑 변호사가 같이 하자고 연락해 와서 헌법재판을 맡게 되었다. 사형폐지운동을 해 오던 나로서는 피고인 쪽에서 신청을 하지도 않았는데 법원이 먼저 알아서 위헌제청을 한 것을 당연히 두손 들어 반겼어야 했다.

어떤 재판부이기에 이런 멋진 모습을 보여 주는고. 좀 알아보았더니 한두 해 전 내가 맡았던 오송회 재심 사건에서 무죄판결을 했던 재판부였다. 전두환 정권 시절 군산 제일고등학교 선생님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잡아다가 몇 년씩 감옥살이를 시켰던 일에 대해 그 재판장은 판결문에서 나라를 대신해서 사과했다.

그 재판장은 그 뒤 서울에 올라와서 일명 ‘도가니 사건’ 형사 2심 재판으로 터무니없는 곤욕을 치렀다. 성추행을 당했던 어린 학생의 부모는 가해자와 2심에서 합의를 했다. 만약 1심에서 합의했다면 판사가 재량의 여지 없이 무조건 공소기각을 했어야 할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를 고려해서 2심은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통상 수준의 판단이었는데, 영화 <도가니>가 나오자 상황이 확 바뀌었다. 저런 악한을 풀어 준 판사가 도대체 누구냐며 난리가 났다. 여론 재판은 항상 그 당·부당과 상관없이 무섭다. 그 일이 그렇게 매도될 건 아니었다.

어쨌든 이게 어인 횡재인고. 살인 사건 법원이 스스로 나서서 사형제도가 위헌 의심이 있다고 판단해 주었단 말이지. 그런데 사건 내용이 내용인지라 법원의 이 훌륭한 결정을 반기기에 앞서 좀 난감했다. 아주 억울한 사건을 골라 위헌제청신청을 하려 했는데.

하지만 이렇게 정면승부 하는 게 맞는 일이었다. 억울하게 누명쓰고 사형당하게 된 경우 초점은 억울한 정황에 맞추어지게 마련이고, 이건 사형제의 본질을 따지는 데서 벗어난 일이다.

2009년 6월11일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사형제 위헌법률심판 사건에 대한 공개변론. ‘70대 어부 연쇄살인 사건’을 맡은 광주고등법원이 위헌제청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프랑스는 왜 여론 반대에도 사형을 폐지했나 

사형제가 필요하다는 여론은 대개 60퍼센트에서 아래위로 왔다 갔다 한다. 다른 나라도 비슷하다. 일본의 사형 지지율은 이보다 훨씬 높다. 사무라이나 가미카제 특공대의 죽음을 미화하는 전통과 동전의 앞뒷면일까. 어쨌든 이 60퍼센트를 기준으로 흉악범죄가 일어나면 70퍼센트 가까이 오르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같이 심금을 울리는 영화가 나오면 50퍼센트대로 떨어진다. 그 영화는 주인공이 잘생기고 동정심을 가지게 할 만한 캐릭터에다, 살인도 우발적으로 일어나 어느 정도 변명거리가 있으니 그랬다. 우리에게 사형제도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도록 했다는 점에서는 큰 수확이었지만, 사형의 본질에 정면으로 마주 서지 못한 측면이 분명 있었다.

‘살인범이 불쌍한 면이 있으니 사형은 안된다’를 넘어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가지고 사형제도에 정면으로 마주서는 게 필요하다. 저 흉악한, 금수만도 못해 보이는 저 사람을 국가 손으로 죽일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형은 안 된다’고 말할 것인가.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언젠가 이러셨다. “김 변호사, 괜히 텔레비전 토론 같은 데 나가서 애쓰지 말아. 사람은 누구나 응보감정이 있기 때문에 설득으로 폐지 여론이 과반을 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그냥 국회의 결단으로 국가가 사람을 죽이는 일을 그만두도록 하는 거밖에 방법이 없어.” 옳으신 말씀이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150년 전인 1863년에 이미 사형을 폐지한 베네수엘라도 지금 우리보다 흉악범죄가 적어서 그런 게 아니고, 국민 대다수가 찬성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프랑스도 1981년 사형제를 없앨 당시 국민 3분의 2가 반대했다. 프랑스 의회는 사형폐지 입법을 하면서 이랬다. “올바른 입법을 하는 것이 국민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며 그것이 민주주의 원칙이다.”

어린 처자들 유방을 단도리 짓겠다고 젊은 청춘을 넷이나 죽인 어부 노인 사건에서 나는 유럽평의회로부터 이런 의견서를 받아다가 헌법재판소에 냈다.

‘유럽에서는 사형이 인간 존엄성 및 생명권에 대한 존중이라는 근본 가치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서 전적으로 배척하는 방향으로 법적 입장이 진화해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화는 사형 폐지에 대한 대중의 지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사형에 찬성하는 유럽인들이 여전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럽이든 다른 지역이든 사형 폐지는 근본 가치의 문제이기 때문에 여론조사로 그 방향이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사형은 범죄를 감소시키거나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하거나 정의를 구현하는 해법은 아닙니다. 사형 폐지는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근본 가치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이 의견서를 내긴 냈는데 과연 헌재 재판관들이 이 심오한 글을 보았을까?

왜 사형을 없애야 하는지를 이렇게 훌륭하게 요약한 글을 본 적이 없다.

나는 그동안 여러 유형의 살인 사건을 이래저래 꽤 많이 다루었다. 치과의사 모녀 살해 사건은 8년 긴 세월 대법원과 고등법원을 오르내리며 무죄와 사형 양극단을 오갔다. 인혁당 사건에서는 재심 추진 15년 만에 여덟분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하지만 그 판결로 40여년 전 목에 밧줄이 걸려 돌아간 분들이 다시 살아 돌아올 수는 없었다.

 당신 딸이 당했어도 살인자가 존엄하냐고? 

그중 한번은 변론을 하다가 정말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순간도 겪었다. 내 의뢰인은 현장에서 망을 보고 살인을 도와준 공범 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그의 혐의를 벗기기 위해 주범을 닦아세워야 할 차례가 되었다. 범행 자체가 잔혹했고 주범은 법정에서도 도무지 무서운 게 없어 보였다. 그를 호송해 온 교도관이나 심지어는 검사와 판사도 그를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회칼’이 무서운 게 아니라,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 모두가 후환을 두려워했다고 할까. 아하, 저자를 추궁해야 하는 내 처지가 한심했다. 일단 신문을 시작해서는 앞뒤가 안 맞는 그를 세게 다그치긴 했지만 어쨌든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거의 야수 같았다. 저렇게 사회에 위협적인 친구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해 주어야 하는 건가. 답은 헌법에 써 있는 대로 ‘그렇다’이다.

보성 앞바다의 노인도, 세상에 아무것도 무서운 게 없어 회칼을 마구 휘두른 저 친구도, 모두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닌다고 헌법에 분명히 씌어 있는 걸 어쩌랴.

얼마 전 텔레비전 토론에 나와 달란 요청을 받았다. 지나가는 여자를 납치해서 죽이고 사체를 심하게 훼손해서 사형선고를 받은 오원춘 사건이 주제였다. 피치 못할 다른 일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보나마나 그 자리에서도 그간의 수많은 토론 때처럼 이런 질문이 나왔을 게다.

“김 변호사, 당신 딸이나 가족이 그런 일을 당했어도 여전히 그가 존엄하다는 말이 나왔을까요?”

“내 개인 입장에서야 그자를 내 손으로 죽이고 싶겠지만 어쩌겠어요. 헌법은 착한 사람뿐 아니라 악당도 살인마도 ‘모든’ 국민이 존엄하다고 선언하고 있으니, 최소한 국가는 헌법을 지켜야 할 거 아니겠어요. 온 국민들이 저놈을 죽이라고 아우성쳐도, 헌법을 지킬 의무가 있는 국가는 ‘안 됩니다’ 하고 거절할 수밖에요.”

2009년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공개 변론 때도 이런 취지로 이야기했다.

헌법 책을 들여다본 게 대충 35년 세월이지만, 근자에 들어 모든 국민이 존엄과 가치를 지닌다는 헌법 제10조의 선언은 정말 새삼 다시 보인다. 성서나 불경 같은 종교 경전도 아닌 세속 권력구조 속에 어떻게 이런 ‘비현실적’인 말씀이 버젓이 자리잡을 수가 있단 말인가.

기독교는 꼭 믿어야 할 교리를 여럿 가지고 있다. 옛날에는 인간이 만물의 중심이라 믿었고, 하늘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건 그 당연한 귀결이었다. 1만년이 채 안 되는 역사의 첫 시작 때 창조주가 흙으로 사람을 빚어냈다는 것도 꼭 믿어야 할 교리였다. 우주 물리학과 진화론은 이걸 다 밀어냈다. 인격신 개념도 그렇다. ‘인격’ 자체가 한계를 뜻하는 것이니 그 어떤 한계도 없는 ‘신’과는 절대 모순이다. 신은 또, 돈 잘 벌게 해 달라, 병 낫게 해 달라, 영원히 살게 해 달라 비는 인간의 욕심이나 채워 주는 심부름꾼이 아닌 바에야…. 뇌 과학이 밝혀내는 대로 ‘영혼’의 처지도 점점 옹색해져 가고 있다. 사람의 모든 인식 작용이 그러하듯이, 스님의 삼매경이나 목사님의 신비 체험도 물질인 뇌의 전기적, 화학적 신호와 신경다발들의 상호 작용으로 귀결되나니.

그래도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을 ‘복된 소식’. 삼라만상과 우리 모두가 다 ‘하느님의 자녀’다. 어찌 생겼든지, 곰보든 째보든, 악당이든 선인이든 다 하느님의 자녀.

헌법 제10조는 바로 이 복음을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닌다’고 번역했다. 이 어리석은 중생들이 그 모습 그대로 다 부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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