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평화의 연결지점?

 

더글라스 러미스와 쓰지 신이치의 대화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전개된 이야기는 러미스의 살아온 인생을 돌이켜 보면서 러미스의 사상과 주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자연 속에서 놀고 사람들과 어울렸다는 러미스. 어린이들이 뛰어놀고 장난감을 스스로 만드는 것을 중요히 생각했다. 시간낭비가 아니라 사회를 비약하는 힘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레크리에이션처럼 휴식이 아닌 놀이 자체의 목적을 두는 것 말이다. 나도 어릴 적에 성미산에서 많이 뛰어놀았던 경험이 많다. 아지트를 만들고 길을 외우고 다니면서 성미산은 단순한 공간이 아닌 놀이의 집합소였고 추억이었다. 그 마음을 시간이 지나면서 잊어갔다. 그러다가 이야기꾼 인턴쉽에서 어린이들을 많이 만나면서 밝아지고 순수함이라고나 할까? 즐거움을 많이 찾았다.

러미스는 그 후로 군대를 가는 것을 고민했다. 고등학교 때 ROHC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학생 운동이 시작되었던 때라서 고민을 했지만 군대에 갔다. 훈련으로 일본과 한국을 전전하며생활을 했는데 군인의 삶 = 미국의 힘이라는 명제가 자신의 모습이 아닌 것 같아 정체성에 혼란을 겪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오키나와에서 친구를 만나 일본의 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지내기 시작한다.

일본에서는 검소한 생활을 했다. 군대 안에서 풍요로운 생활을 했지만 스스로 맞지 않는다고 느꼈고, 일본 생활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의 삶을 찾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근대화가 진행되는 일본의 모습과 아메리카 드림으로 인한 오리엔탈리즘 외국인이 늘어나면서 고민에 빠진다. 평등한 것이 아닌 위에서 내다보는 식민지주의적인 시선. 사람을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데이터나 현상으로 보는 일본의 모습이 싫증나서 러미스는 결국 미국으로 돌아간다. 이 때 러미스 개인적으로는 전통적인 것을 재조명해서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개혁과 성찰을 시작한 시기이다.

가난이 힘든 것은 가난 자체가 아니라 가난에 의한 외부영향의 문제라는 말이 있다.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면서 생길 수도 있는데 희망이 있기에 절망할 수도 있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열심히 하면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희망고문인 셈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열심히 노동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형태에서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에 대한 미묘한 부분이 남는다고 말한다. 현시대에서도 사회비판을 할 때 상당히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미국에 돌아갔을 때에는 자유언론운동을 학교에서 시작한다. 정치학을 공부 및 교육하며 규제된 언론과 발언의 자유를 외쳤다. 이 때 베트남 반전의 평화와 사랑, 그리고 에콜로지의 Back to the Earth’ 라는 구절을 쓰지 신이치가 말씀하셨는데 60년대 후반, 평화와 에콜로지의 융합이 활발했던 때라고 한다. 우석훈의 <생태 페다고지>에서 현 시대 탈핵운동도 에너지 문제 뿐만 아니라 반전, 녹색운동으로 평화와 연결되는 지점이 많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러미스의 말도 역시 비교가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을 때 일본의 헌법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처음 알았던 사실인데 일본의 헌법이 평화와 많은 연관성을 띄고 있다는 점이었다. 천황의 권력 자체, 군사력 포기 등 말이다. 최근에 아베 정부가 다시 군사권을 가지려고 한다는 뉴스를 떠올려보면 그 말이 이해가 간다.

 

 

 

환경을 생각한다고 하면 검소, 절제,

평화를 생각한다면 반전

환경과 생태 공부를 통해 윤리 도덕적으로만 생각하는 관점이 있었다. 무조건 지켜야 옳은 것이고 그로인해 죄의식이 생기고 절망하기도 했다. 그 때에는 사명감을 가지고 했다. 성미산 지키기 운동을 예로 들자면

평화 = 평평한 상태

하지만 성미산에서의 나는 상하관계를 느꼈다. 울타리가 쳐지고, 추억이 깃든 숲이 사라졌을 때, 정작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외로운 싸움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잠시 성미산을 멀리 하기도 했다.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을 찾아본다면 나는 그 교차점을 살짝 건드려본듯 싶다. 내가 경험한 싸움이나 이슈들 자체가 그 속에 깃든 사람들의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미산도 그랬고, 강정마을도 그랬고, 밀양도 그랬다. 그럼 현 시대에서는 책에서 설명하는 그 교차점이 진행중인 것인가? 그러면 왜 옛날에는 그 교차점이 만나지 않고 평행했을까? 그리고 어느 때부터 교차점을 가지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