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던 나눔에 관한 질문들
아름다운재단 10주년 컨퍼런스


                                                           <강연 방향 - 조한혜정(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하자센터설립자)>

 <나눔은 현대 잠깐의 시기를 제외하고는 삶 바로 그 자체였다>

 
1. 나누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다.

지난 십년 대안학교들이 많이 생겼고 그 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가장 즐겨 부른 노래는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노래이다. 그런데 나는 앞으로 십년 우리는 “나누지 않으면 사는 것이 아니다”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5만년 역사를 보면 나눔의 행위는 밥 먹는 것만큼이나 일상화된 행위이자 가장 고차원적인 신성한 행위였다. 몇가지 에피소드를 말해보자. 부족사회를 연구한 한 인류학자는 현장을 떠나면서 그곳에서 가장 친했던 주민에게 자신이 아끼던 보석 목걸이를 선물하고 왔는데 몇 년 후에 가보니 그 목걸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신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목걸이를 만들었던 보석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예쁜 것은 당연히 혼자만 보고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족사회에서는 생색을 내는 사람은 가장 무시를 당하는 사람이다. 현대사회에서도 [러브 스토리]라는 영화의 마지막 구절에 주인공이 말하듯이 우리는 사랑하는 관계에서는 “미안하다” “고맙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장기적 공생관계에서는 모든 것이 나눠지고 순환된다. 사냥꾼이 잡은 거대한 포획물도 아주 공평하게 분배된다. 그가 잡았기 때문에 특히 많이 가져가는 것은 아니다. 그 사회를 굴러가게 한 것은 다양한 정교한 나눔의 자리였으며 그 무수한 교환은 경제적 이득을 위한 것이면서 실은 생성되어가는 사회적 관계의 영속성을 표현하기 위한 신성한 의례였다. 공생의 감각 등과 관련된 ‘사회’가 늘 ‘경제 활동’을 일정하게 조정하였다.


2. 현대 자본주의의 비극

현대 사회는 어떤가? 나눔이 적을수록, 자족적일 수록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않는가? 냉장고의 발명으로 인간은 고기를 저장해둘 수 있게 되었고, 화폐의 발명으로 인간은 무한정 재물을 축적해둘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풍요로운 삶을 약속하는 축복이었다. 돈만 있으면 생명보험을 들고 세콤을 해서 도둑이 얼씬 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고 세계 최고의 의사에게 진료를 받을 수도 있다. 아무의 신세도 지지 않고 부탁을 받지 않고도 잘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 재앙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아차려가고 있다. 모든 관계가 단기적 교환에 의한 축적-이윤추구의 행위로 환원되면서 막상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인간관계로 풀던 많은 것들이 돈과 제도를 통해 해결되면서 대부분의 관계는 단기적 등가 교환관계가 되고 부모 자녀 관계까지 투자와 회수의 관계로 전락하고 있다. 나눔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회가 되면서 나눔도 제도화되어 복지국가가 들어서고 재단들이 생겨났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가장 훌륭한 강당은 재의 기부자는 자녀들과 재산 싸움을 치열하게 했던 여성이다. 그는 그 돈을 명문 대학에 기부함으로 명예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최고의 부자 소로스와 빌 게이츠도 자신의 대부분의 부를 사회에 환원하였다. 이런 나눔으로 사회는 굴러갈 수 있을 것일까?

거상들만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 기부자들도 오래전부터 있었다. 대영제국 시절부터 다양한 형태의 기금들이 가난한 식민지 나라에 전달되었다. 선진제국의 제국주의적 확장의 이면에는 늘 구호물자를 전달하는 착한 ‘선진국’ 시민들이 있었다. 가장 선진적인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식민지로 나간 선교사들 외에도 왠지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 사람들이나 자국 안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주민들은 자신들보다 한결 불행한 저 먼 나라에 있는 이들을 돕는 일에 몰두하였다. 이들의 선행은 때로 자신을 스스로 동정하는 높은 위치에 세워두고 위로하는 행위로, 그래서 기부 대상국 주민들을 대상화한다는 면에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서양의 소년 가수들은 아직도 “아시아의 수백만 아이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다.”는 노래를 부르면서 왜 그들을 구제하지 않느냐고 울부짖기도 한다. (예를 들어 Galbraith Declan의 tell me why). 자본주의 사회가 점점 더 제도화되어가면서 이제는 선행 단체도 하나의 기업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기부자들은 별로 늘어나고 있지 않다. 신자유주의는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말라, 오로지 자기 계발과 자기 관리에 힘쓰라”고 명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시장과 기존 NGO로 이루어진 삼각구도의 균형이 깨지면서 그 체제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 보인다. 무엇보다 활기 있는 삶을 살아야 할 사람들의 열정과 활기가 사라지고 있어서 문제적이다.


3. 근대적 자아관과 자족의 신화를 넘어서기

시장이 일상적 삶을 압도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부유하기 시작했다. 열정을 가진 사람들은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근대적 조직은 이미 효과가 떨어진 상태라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국가공동체가 홈리스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들 자신들이 스스로 발언을 하면서 나눔의 방법을 찾아가야 할 때일지 모른다. 불특정 다수는 숫자로 돕는 거대한 복지적 시스템을 떠나 상호 면식이 있는 이웃을 도우면서 기존의 제도가 미처 보지 못하고 있는 영역을 가시화 하고 공생의 길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두 가지 작업이 진행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근대적 자아관을 넘어서기’ 그간 우리는 자족적 개인을 이상으로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경제적 독립, 정신적 독립을 외치며 모든 상호의존적 관계를 약한 고리로 만들어버리다 못해 외톨이들이 되었다. 이제 외톨이들은 거대한 시장의 고도관리 체제 속에서 조용히 숨죽여 살고 있다.

칸트적 자아관은 중세의 질서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자아관이지만, 후기 근대적 사회를 위한 자아관은 아니다. 인간을 독립적 개체를 상정함으로 상호 의존적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퇴화시켜버린 것인데 지금은 바로 상호의존적 관계로서의 인간을 회복해야 할 때이다. 근대적 주체성/자아관을 넘어서지 않으면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기 어렵다. 독립적인 자아는 늘 상대를 타자화하고 위계화하며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만든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 필요한 것은 ‘동정’ pity 이 아니라 측은지심/compassion이다. 상대를 타자화 하지 않고 공동운명체로 느끼는 공생의 감각,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체와도 탯줄로 이어진 존재라는 공통의 감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모든 것, 물건에도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을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화가의 창작물인 그림은 화가로부터 완전 분리될 수 없다. 창작물은 전매될 수 없다.”라면서 소유권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거론한다. 그리고 불교의 윤회설과 전생에 진 빚, 그리고 나눔의 존재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간주관성 intersubjectivity 과 소통능력, 나누는 관계에서 나오는 사회성과 창의성, 함께 하는 놀이, 일상의 질서에 의문을 던지는 비판적 성찰성, 나눔, 키움, 상생, 연결, 온정, 충실, 충성 (사회공헌을 하려는 욕구)의 윤리를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4. 나눔의 시대를 열어갈 사람들은 어디에?

나눔의 시대를 열어갈 이들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결핍이 아닌 풍요의 시대를 살아 온 세대, 나눔이 필요 없어서 자연스럽게 솔로가 된 청년들로부터 찾아지지 않을까 싶다. 나라의 부름을 받은 애국지사도, 시장의 부름도 받은 산업역군도 되지 않아도 되는, 글로벌 시장의 간택을 받은 명품 인재가 될 마음도 없는 모태 솔로, 그 ‘히키고모리들’의 반란이 시작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이미 외톨이의 삶이 아주 익숙해진 일본의 히키고모리들은 “지진 날 때만 기다린다.”고 한 소설가는 말했다. 공헌할 사회적 자리가 주어지지 않은 이들은 누구보다 “나눔을 통해서만 자신이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족을 향해 달리던 부모세대와 달리, 이들에게 자족은 벗어나야 할 굴레이다. 그것은 저주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이제 문제적이 되어버린 ‘자족’적 삶의 시대는 가장 처절하게 솔로가 된 세대가 해결할 것인가? 이들은 드디어 나눔을 통해 삶의 연속성에 대한 열망의 몸짓을 짓기 시작할까? 사실상 시대 변화를 보면 그간 소수 엘리트에게만 가능했던 자아실현이 이제는 다수 청년 대중에게 가능해졌다. 승자독식의 스펙 경쟁을 하지 않기로 한다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딱히 할 일이 없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중세의 귀족 자녀들처럼 귀족 놀이를 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다. 디시 인사이드 갤러리에서 일어나는 잉여 짓은 사실상 경제적 가치와 구분된 교환/증여의 놀이이다. 그러다가 이들은 서서히 기지개를 펴고 비슷한 놀이친구들과 만나 농사를 짓거나 노래를 지으면서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사회적 기업 콩세알, 그리고 유유자적 살롱 등이 바로 온몸으로 자신을 사회와 놀이에 기부를 하면서 새 판을 짜는 사람들이다.

그런 청년들과 함께 질주하는 롤러코스터의 삶이 더 이상 아니라고 판단한 청년들이 만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런 이들이 세대, 계급, 젠더의 경계를 넘은 나눔의 관계망이 생긴다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신세도 지고 부탁도 하는, 서로 피해를 좀 주고받는 관계가 허용, 장려되는 시공간이 필요하다. 물건, 서비스, 아이디어 권리, 재산, 춤, 노래, 의례, 권위, 밥, 식탁 공동체 등등 자신의 일부, 영혼이 깃든 모든 것을 서로 적극적으로 나누는 공간. 떡밥이 있고, 은총이 있는 곳, 중세 교회당, 조선시대 문중의 사랑방, 그리고 산속 스님들의 절간 같은 곳이 이제 도심에서 다시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오래된 나눔은 단골과 품앗이 관계로 발전되고 다양한 상부상조의 시공간을 확장해간다. 성미산의 작은 학교와 동네 부엌과 동네 요가방 등처럼. 이제 나눔은 다시 5만년 인류의 역사에서 차지했던 자리로 돌아온다. 경제 생산을 통해 유토피아를 만들어 보려했던 것이 신기루였음을 깨달으면서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당연, 경쟁, 효율, 적대적 내면을 가진 이들이 아닐 것이다. 아니 우리 모두는 이미 경쟁과 적대의 몸을 가지고 있으므로 함께 나누면서 협동, 생성, 환대, 우정의 몸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눔의 공간을 마련한다. 네트워크 사회의 허브 형 인간이 모이는 곳, 길러지는 곳. 그런 곳 중 하나가 하하허허 살랑, 하자 창의 허브이다. 이제까지의 이야기가 뭔 말인지 나누어졌다면 다들 여권신청을 하시라! 나눔의 극히 개인적이면서 집단을 향해 열려있는 존재 방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나누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별 헤는 맘으로 …….”를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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