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국제여성영화제 “여성, 장소, 소셜” 라운드 테이블 발제문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그 이후>

조한 혜정 

  
나는 지금 전주 한옥마을 게스트 하우스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임의진의 ‘여행자의 노래’를 들으면서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 당신이 1929년에 쓴  『자기만의 방』은 표현 욕구를 풀지 못했던 많은 여성들의  가슴을 마냥 부풀게 했던 책이지요. ‘경제 자립’과 ‘방해 받지 않을 시공간’은 당당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이라는 당신의 주장은 세계 많은 여성들을 열광시켰습니다. 크고 작은 관계와 일상을 돌보아야 하는 ‘아버지의 집’에서 여성들이 방해 받지 않는 ‘자기만의 시공간’을 갖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던 만큼, 당신의 말은 혁명적인 발언이었습니다. 그 이후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여성들의 투쟁은 줄기차게 일었고, 드디어 그 목적을 성취한 이들은 자기만의 방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글을 쓰고 수시로 ‘자기를 찾는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이제 상당히 많은 여성들이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되었고 그들은 세상의 풍경을 크게 바꾸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자기만의 방’이라는 말을 들어도 내 가슴은 더 이상 뛰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때가 많습니다. 요즘 정신없이 일해야 하는 40대 남자들의 소망이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홀로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라는 말을 들을 때 착찹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 그보다도 ‘자기만의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 사람들, 한 평짜리 창문도 없는 방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며 사는 ‘방살이 나홀로’족 청년이 모습이 오버랩 되기 때문에 나는 아주 힘이 듭니다. 아마도 그들 중 상당수는 ‘자기만의 방’을 가진 여자들의 남편, 그리고 그 여자들이 낳고 키운 자녀들일테지요. ‘자기만의 방’을 확보하기 위해 맹렬하게 싸왔던 당신의 ‘열혈 팬’의 집에서 자란 자녀들이 그 집에 마련된 ‘자기만의 방’을 피신처로 나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무섭다면서 ‘자기만의 방’ 깊숙이 숨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버니지아 울프, 당신이 지금 이곳으로 돌아온다면 이 세태를 보며 무슨 말을 할 지 궁금해집니다. 시대를 읽는 냉철한 눈과 따뜻한 가슴을 가진 그대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 시절입니다.
 
- '자기만의 방'에 피신처를 마련한 ‘히키코모리’들 
  
한국 사회에 니트족NEET이 백만이 넘었다고 합니다. 니트족이란 학교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직장에 다니지도 않고 직업을 위해 트레이닝을 받지도 않는 사람을 말하지요. 이들은 국가가 잡은 통계상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이들’이지만 실은 대부분이 ‘자기만의 방’에서 혼자 뭔가를 부지런히 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때 사회에서는 이들을 두고 ‘문화의 시대’를 열어갈 ‘마니아mania’라는 이름으로 칭송을 하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비물질 노동’에 몰입하는 이들을 사회는 탈산업사회와 지식정보사회의 주인공이라고 부추겼고, 창의 산업, 문화 산업을 일으킬 주역이라며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청년들은 스스로를 ‘잉여’라 부르면서 홀로 자기만의 방에서 침잠하고 있습니다. 자기만의 방에서 주식을 사고파는 일에 몰두하던 청년, 또는 온라인 게임에 몰입했던 청년들 중에 어느 날 대박을 쳤다면서 사회로 나와 활개치는 이들도 나오기도 했습니다만, 문화적 활동에 몰입해온 당신의 후예들은 점점 더 은둔 모드로 들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상했던 ‘문화의 시대’는 오지 않고 ‘금융의 쓰나미’가 삶을 삼켜버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은 외톨이가 된 청년들의 우울한 기운이 폐허가 된 대기를 감싸고 있는 중입니다. 
  
일본의 이야기를 좀 해보지요. 경제 호황을 이루었던 1970, 80년대 일본에서는 하루 대여섯시간 만 일 하고 나머지 시간에 자기가 하고 싶은 활동에 몰입하는 ‘프리타’족이 등장했습니다. 회사에 목매달지 않고 자기만의 시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프리타의 삶은 많은 청년들이 지향한 이상적인 라이프 스타일이었지요. 그런데 지금 일본에서는 ‘백만 프리타여, 당신들에게 미래는 없다네“ 라는 평론가의 빈정거림과 함께 ‘무연無緣 사회론’이 일고 있습니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사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그 추세는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일본 인구 문제 연구소의 예측에 따르면 지금 추세로 계속 간다면 2130년에 일본인구의 1/3이 단신으로 살고 있을 것이고, 한번도 결혼을 안 한 남성이 29.4%, 여성이 22.5%에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연’이 끊어진 홀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급격히 늘어 ‘무연(고)사회’가 될 것이라는 경고인데, 한창 일할 나이에 직장도 파트너도 없이 혼자 사는 30, 40대가 1/3이 되는 사회의 삶을 상상해보세요. 
  
아무데도 소속되지 않고 사는 NEET, 고슴도치처럼 자기 방에 틀어박힌 ‘히키코모리’들을 ‘사회’로 끌어내는 일을 하는 뉴스타트 NPO 단체에서는 올해도 ‘니트족 축제’를 개최했는데 나는 그곳에서 십년 이상 자기만의 방에 피신해있던 열 명의 청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 중 세 명은 어릴 때 훈육적인 학교생활을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집에만 있었던 경우이고, 나머지는 대학졸업 후 취업이 안 되거나 한번 취직 했지만 직장을 잃은 후 두문불출을 하게 된 경우였습니다. 일본에서는 집에만 있는 자녀로 인해 가정불화가 잦고, 방에만 있는 아들에게 나가 일을 하라고 윽박지르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아 죽은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학교와 일터, 그리고 사회 기피증을 보이는 인구가 늘고 있고 그들의 마지막 피난처는 부모의 집에 마련된 ‘자기만의 방’인 것입니다. 
  
최근 ‘두문불출 방살이족’이 증가하는 이유는 사회에 청년들이 살 자리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자리도 없지만 힘겹게 일자리를 잡아도 일하는 것이 죽기만큼 싫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청년들은 별 어려움을 겪지 않고 부모의 보호 아래 곱게 자란 편인 지라, 살벌한 일터에 간다는 것이 두렵고 그런 자리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힘이 겨운 것이지요. 포럼에 나온 서른 살의 청년은 자기만의 방을 제공해주는 부모가 은퇴하거나 돌아가시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자기 스스로도 그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면서 홈리스가 되거나 자살을 하는 수밖에 없는데 자신은 자살 쪽을 선택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고 하였습니다. 회사를 다니는 한 남자는 아침에 출근할 때 엄마를 한 대 때리고 간다는 말도 들었는데 회사 가는 일이 너무나 싫은데 가야 하는 것을 엄마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청년 역시 조만간 집안에 들어박힐 청년일테지요. 봉준호 감독이 2008년 미셀 공드리, 레오 까락스와 함께 만든 옴니버스 영화 <도쿄!>의 주인공은 홀로 사는 ‘나이든 청년’입니다. 그는 부자집 아들이기 때문에 꽤 큰 집에서 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두문불출 은둔형의 전형적 히키코모리의 삶을 사는 경우였습니다. 
  
1990년 거품 경제가 꺼지고 20여년 경제 침체가 계속되면서 일본에서는 방살이족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보면 부모의 경제적 여유와 너그러운 포용성에 좌우되고 있는 것이지요. 최근 일본 지진으로 인해 동북 지역 히키코모리들이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기사를 어디선가 읽은 적도 있지만, 그들이 나온다고 무슨 수가 있을까요? 2008년 ‘리만 쇼크’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인한 금융위기, 내지 미국 발 글로벌 금융위기를 일본에서는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이후 많은 청년들이 직장을 잃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부모 집에 있는 ‘자기만의 방’으로 찾아들어갔지만 ‘염치’가 있는 청년들은 부모에게 미안해서 집으로도 가지 않고 ‘넷카페 난민’으로 전전하며 홈리스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1980년대부터 생겨난 히키코모리/방살이족은 이제 나이가 들어서 나이 40살이 넘었고 일본에서는 청년 정책의 대상 연령을 현실화해여 40대로 올리려고 한다는 말도 나돌고 있습니다. 
  
- 늘어나는 한국의 ‘방살이’족
  
이 현상은 평생 고용의 세계관 아래 교육과 노동 정책을 펼쳐온 일본 사회만의 산물일까요? 그렇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IMF 경제 위기 이후, 우리 주변에도 방살이족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만의 방을 갖기 위해 문을 잡아 걸고 책상들을 쌓아 바리케이트를 치기도 하지요. 2008년에 나온 영화 <김씨 표류기>에 바로 그런 십대 소녀가 등장합니다. 지금은 아주 많은 독립영화에 이런 주인공들이 등장합니다. 
  
돌이켜 보면, 가난한 시대에 ‘자기만의 방’을 열망했던 부모의 자녀들은 경제적으로 크게 부족함이 없이 자랐습니다. 부모가 마련해준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자랐으며, 많은 장난감을 소비하면서 혼자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곤 하였습니다. 일류대학에 가기 위한 경쟁이 심해지면서, 학교도 가지만 학원에도 가야 하게 되면서 그들은 친구를 만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혼자서 공상도 많이 하고 아주 많은 것을 보고 생각했을 것이다. 생존경쟁이 치열해진다는 불안에 어머니의 관리감독이 심해질수록 이들은 점점 더 강박적으로 혼자-실은 엄마와 한 쌍으로- 모든 것은 감당해내고 책임지는 존재가 되어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예의바른 시민으로 자랐을 수는 있지만 그만큼 세상에 대한 남다른 공포감을 갖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오로지 엄마와 아버지의 인정을 원하면서 자랐을 수도 있겠지요. 부모의 집이 온 우주였을 테니까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청년들을 보면서 나는 요즘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자주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이야기들은 가끔 책으로 출간되기도 하였지요.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20대 상상을 시작하다』에서 대학교 3학년생 서명선은 “독방에 처박혀 혼자 열심히 하다 보면 어느 날 완벽한 인간으로 변신하는 날이 온다는 판타지”를 자기 세대는 갖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또 소비 세대로서 “각종 최신형 기기와 미디어는 자신들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심지어 자신들의 단 하나의 사명인 ‘수능을 잘 치기 위한 공부’도 소비로 해결했다.”고 쓰기도 하였지요. 그는 “여가까지도 어른들이 모두 세팅해 놓은 게임의 세계에서 해결했기에 자신들은 새로운 것들을 시도할 기회도 욕구도 생길 수 없었”는데 그것은 어릴 때 곧 1990년대에 부모의 재정적 여유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는 해석을 내립니다. 그런데 갑자기 부모들의 경제력이 약해지면서 자신의 삶이 변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보게 된 이들이 늘어났다면서 이런 상황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내동댕이쳐지는 경험”이었고, 이후부터 오로지 “자기 혼자 온전하게 세상과 맞서야 한다는 극도의 불안감과 자괴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자기만의 방’에서 혼자 컴퓨터하고 공부하면서 지냈던 이들이 대학에 가서도 스펙 쌓기로 돌입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겁니다. 많은 대학생들이 입학하자마자 ‘방살이’를 하면서 각종 자격증과 고시공부에 돌입하는 이유는 혼자서 열심히 하면 되는, 익숙한 숙련 노동이기 때문일 것이고, ‘추락하면 끝’이라는 공포심으로 이들은 자기만의 방에서 뭔가에 ‘집중’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집중의 결실이 맺기 어려운 열매나무라면 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협동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려는 시도를 할까요? 그들이 협력으로 인해 ‘만물의 영장’이 된 인류의 후예라면 당연히 그러하겠지요. 
  
서명선은 타인은 물론 자신조차 불신하는 사람들끼리 함께 일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경쟁에 길들여진 이들은 혼자 있는 것이 가장 편하고, 그 “경쟁의 독을 빼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는 고립되고 외로운 만큼 소통에 대한 기대가 커서 “조금이라도 감정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끼면 바로 그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신이 상처받기 전에 얼른 그 관계를 끝내버리는”것이 자기 세대의 성향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연애를 두어 번하고 나서는 감정 노동이 힘들어서 더는 연애를 하지 않겠다는 남학생들을 나는 자주 보곤 합니다. 서명선은 자기 세대를 “등록금이 1년에 10%가 올라가도 무관심한 척하면서 편의점의 삼각 김밥을 살 때는 10% 할인되는 카드를 꼭 챙기는” 사람이며 그 상태로 계속 혼자 살아가게 되면 자기 세대는 거대한 ‘잉여의 상태’에 머물 것이라며 우울한 글을 맺고 있습니다. 
  
‘부모의 집’에 마련된 ‘자기만의 방’이 없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느냐고요? 같은 책에서 박재용은 자기 세대의 거처는 ‘온전한 집이 아니라 방으로 여겨지는 곳’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것을 ‘절박한 방살이precarious one room living’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개인 벌이가 괜찮으면 원룸이나 오피스텔을 구할 수 있지만 대개가 옥탑 방이나 반지하방, 지하방, 그리고 침대 하나만 들어가면 가득 차는 고시원이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들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방들 사이에서 20대들은 끊임없이 쳇바퀴를 돈다.”고 그는 말합니다. ‘방살이’는 집의 억눌린 분위기에서 벗어난 자유, 혼자 있을 수 있는 자유, 성인으로서 자신을 책임진다는 자유를 선물하지만 그것도 잠깐, 고립된 섬에서의 삶을 처절하고 절박하다는 것이지요. ‘고립된 섬’에서 살다보면 사회성이 줄어들고 자신감도 없어지는데, 불안한 세상에서 눈에 띄면 오히려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자신들은 점점 투명인간이 되어간다고 그는 말합니다. 재용은 ‘부동산 불패’의 신화를 이룩한 과도한 욕망의 부모세대의 자식들은 이제 경제적 약자이자 ‘방살이’족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방의 크기와 안락함은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부모의 재력과 그들의 ‘너그러운 심성 내지 영리한 지략’에 비례할 테지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모토로 계속 초경쟁적인 몸을 만들면서 쉬임없이 가고 있는 청년들은 대부분 부모의 기대를 만족시키면서, 그래서 그들의 적극적 지원을 받으면 잘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대한 저택을 마련한 이들이 삶도 그리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어렵게 마련한 저택에 갈 시간이 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일주일 100시간 강도 높은 노동을 하면서 몸이 망가지는 것을 감내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틈을 내서 폭음을 하거나 큰 돈을 들여 여행도 가지만 그것은 소비 시장이 만들어낸 상품을 고르는 일일 뿐, 자기만의 방을 즐기거나 자기만의 여행을 기획하는 여유를 내기는 불가능합니다. 
  
초경쟁적 몸을 가졌든, 떡실신을 하고 자기만의 방에 틀어박혀있든 아예 그 방에서 은둔을 하든 이들 청년 세대는 풍요로운 사회에서, 적어도 부모의 희생 덕분에 창의적이고 문화적인 존재로 성장한 존재들입니다.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면 대학 생활을 보다 즐겁고 실험적으로, 사회에 필요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지내다가 취직을 하고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일에 참여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갔을 존재들이지요. 직장이 없다고 불평을 하는 이들에게 정치가들은 눈을 낮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산업사회의 존재로 키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눈을 낮추어도 몸이 훈련되어 있지 않아서 ‘산업 예비군’이 될 수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탈산업사회의 문제,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무수한 문제들을 풀 능력들을 갖고는 있을 수 있지만 공장노동을 할 몸으로 훈련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사회는 결국 새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지 않고 그 가능성을 가진 청년들을 최소한의 공간으로 내몰기만 하고 있습니다. 전지구상의 존재를 하나의 공동운명체로 묶여지고 있습니다. 최근 인류는 9.11, 이라크 전쟁, 환경 파괴, 원자로 폭발 등 커다란 재앙으로 인한 멸종의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그 위기를 패러다임 전환의 계기로 만들어내지는 못하였습니다. 여전히 공장적 생산과 훈육, 당근과 채찍으로 다루는 조직, 이윤극대화를 지상목표로 비전이나 윤리의 논의를 우습게 만들어버리는 ‘무기상들’(영화 <로드 오브 워Lord of War>, 2005), 그 ‘무기상’과 마찬가지로 돈을 사랑하는 이들에 의한 돈놀이(올리버 스톤 감독은 1989년과 2010년 두 번에 걸쳐 월 스트리트를 다룬 영화를 만들었다), 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적 야합과 전쟁에 이르기까지,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기에 급급한 이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한 가운데 모두가 자기방의 방으로 침잠해들어가고 있습니다.
  
- 다시 더불어 사는 ‘사회’ 속으로
  
청년들의 경제 자립은 점점 어려워지고 결혼도 쉽지 않은 세상이 오고 있습니다. ‘귀한 자식’으로, 예민한 시민으로, 까다로운 소비자로 자란 이들은 적극적으로 어떤 연을 맺어본 적이 없습니다. 누군가를 돌보고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도 이들에게는 온라인상에서 애완동물이나 식물을 키우고 때론 사이버 가족이 되어 돌보는 것이 실제 상황보다 한결 익숙하고 편하고 말합니다. 새로운 관계를 맺고 책임질 자신도 없는데다가 “폐 끼치는 것”을 해본 적이 없는 이들이 자기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무 당연한 귀결일 것입니다. 어머니들은 더욱 불안해서 자녀를 통제하고 보호하려고 하고, 그런 부모세대의 공격적인 ‘연 맺기’에 질려서, 자녀세대는 점점 더 자기의 동굴 속에 숨어 있어들고 있습니다. 
  
고시원 방에 있는 사람들, 부모와 얼굴 맞대기를 꺼리면서 한 지붕 아래 차린 ‘자기만의 요새’, 밤이면 관에 들어가서 자는, 야자키 히토시 감독이 만든 영화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2006)에 나오는 방살이 주인공들, 이들은 모두 비슷한 존재 조건에서 ‘자기만의 방’으로 내몰린 사람들입니다. 당신의 권유에 따라 ‘자기만의 방’을 가진 세대의 자녀들, 그들의 자기만의 방, 그곳의 출구는 어디일까요? ‘가모장家母長의 집’에서 미안해하고 불안하면서 카프카의 성에 나오는 K처럼 벌레가 되어간다고 느끼는 예술가 청년들, 스스로를 ‘찌지리’ ‘루저’ ‘식충이’라고 자조적으로 부르기도 하는 ‘방살이’족에게, 불안하게 표류하는 창의적인 청년들에게 당신/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요? 지금은 그들의 불안에 감염되어 그들과 함께 느끼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까요?

아직도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은 시대임을 나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요즘 그 욕망을 접고 ‘우리들의 식탁/마을’을 차리자고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누누이 강조했지만 이들은 어릴 때부터 입시공부 틈틈이 다양한 문화를 즐기고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비물질 노동을 해온 세대입니다. 후기 근대적 상황에서 문화와 소비를 시대를 살았던 이 청년들은 모두가 영화광이고 예비 가수이고 그림쟁이이고 패션 디자이너입니다. 그들은 시나리오를 쓰고 문화기획을 하고 축제 기획을 하고 또 영화감독이 되려는 꿈을 꾸어왔으며 사회에 진출할 적절한 시공간이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욱 더 그 꿈 하나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대기 속으로 녹여버린다”는 자본주의의 속도는 살인적으로 모두를 급격히 고립된 존재로, 그래서 홀로 표류하는 존재로 만들어버리고 있습니다. 바우만Zygmunt Bauman 식으로 나눈다면 자기만의 방을 원하던 어머니들은 ‘고체 근대’를 살아온 존재인 반면 자녀세대는 모든 것이 유동하는 속도전과 이동의 ‘액체 근대’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씩씩하게 세상을 나선 자녀들도 실은 대부분이 글로벌 시공간에서 ‘초합리적 바보’로서 돈 계산을 하면서 정신없이 살고 있거나, 어느 곳에도 닻을 내리지 못한 존재로서 끝없이 부유하며 지내고 있을 겁니다. 그것을 알아서건 아니건 세상으로 나가지 않기로 한 자녀들은 지금 각자의 방에 소우주를 차리고 그 안에서 표류하고 있고 그 방도 없는 이들은 피난처를 찾아 전전하고 있는 것이지요. 닻을 내릴 장소가 필요합니다. 내가 정박한 곳이 지진이 일어날 곳이며, 원자로가 폭발할 위험이 농후한 곳임을 인지하면서 살아갈 세상을 새롭게 상상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만의 방이 아니라 ‘사회’일터이지요. 나는 이들이 자기만의 방에서 나와 함께 밥을 만들고 식사를 나누고 생각을 나누는 동거살이를 시작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자신이 꿈꾸던 창의적 삶을 살기 위해 살벌한 사회 안에 ‘아지트’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문명의 씨앗을 심어 패러다임 전환을 해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기만의 방’을 가진 ‘우리’들이 키운 자녀들은 정말이지, 제품 경쟁과 실제 전쟁에 목숨을 걸도록 키워지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제품을 만들어내는 공장이 아니라 끊어진 사람간의 관계를 연결하는 일터를 필요로 하는 일꾼들입니다. 이들은 경쟁과 적대로 얼룩진 시대의 상처를 치유하고 서로를 용서하고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고 만들어갈 세대입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한 감수성과 정보 처리 능력을 키운 세대이지요. 이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한 평생’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지금은, 정말이지, 어머니들이 ‘자기만의 방’에서 나와 새로운 공공영역을 만들어내는 일을 도와야 할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여유로운 여행을 떠날 여유가 있다면 그 돈의 일부는 꼭 자녀들이 자기 세대의 동료들과 함께 아지트를 마련해갈 수 있도록 기부를 해주고 자신의 공간을 나누어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나눌 식탁을 차려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식탁에 둘러앉을 어머니와 딸들에게 당신의 축복이 함께 한다면 아주 큰 힘이 될 테지요. 길고 반복되는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다면 당신처럼 깔끔한 글을 쓸 수 있을 텐데 지금 시대는 그럴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군요. 그럼 또.
  
2011년 4월 1일 당신의 오래된 한 명의 팬이 보냅니다.

*조한 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이자 또하나의 문화 동인이며, 하자 창의 허브 주민으로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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